[뉴시안=기영노편집위원] 2002한일월드컵축구 영웅 유상철 전 인천 유나이티즈 감독이 지난 6월7일 저녁 7시 서울 아산 병원에서 49세를 일기로 지병이었던 췌장암으로 사망해 축구인 들 뿐 만 아니라 그의 짧고 굵고 화려했고, 또한 남자다웠던 축구 인생을 아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고 유상철 감독은 한국축구가 획기적인 성적을 올렸을 때 늘 그라운드의 주인공이었었다.
한국축구가 사상 처음 올림픽 8강에 올랐었던 2004 아테네올림픽 때는 와일드카드로 활약했었고, 2002한,일 월드컵 축구대회 때는 미드필더로 활약을 했었다.
그런데 유 감독의 축구 인생을 되돌아보면 짝수와 인연이 깊었다.
사상 첫 올림픽 8강, 월드컵 4강
앞서 언급을 했었던 것처럼 2002년 한,일월드컵축구대회와 2004 아테네 올림픽은 한국축구 역사에 신기원을 이룬 대회였다.
2002한,일 월드컵에서는 한국 뿐 만 아니라 아시아축구 사상 처음으로 4강에 올랐었고, 2004 아테네올림픽은 사상 처음 올림픽 축구가 예선을 통과(8강 진출) 했었다. 올림픽 축구는 그 후2012 런던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아테네 올림픽, 2002 한,일 월드컵 두 대회 모두 고 유상철 감독이 주역으로 활약했었다.
아테네올림픽에서는 와일드카드로 출전했었고, 한,일 월드컵에서는 미드필더로 활약하면서, 첫 경기인 폴란드와의 경기에서는 쐐기 골을 터트려 한국축구가 4강에 진출하는데 결정적인역할을 했었다.
2002 한,일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FIFA가 선정한 ‘베스트 11’에 홍명보 선수와 함께 선발되기도 했었다.
그에 앞서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일본과의 8강전에서 천금 같은 동점 골을 터트려 한국이 일본을 펠레스코어 3대2로 제압하고 준결승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었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조별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 벨기에 전에서 후반 26분 경 하석주의 어시스트를 받아 동점 골을 터트리는 순간은 한국축구 월드컵 역사에 명장면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프로 데뷔도 1994년 짝 수 해
고 유상철은 1994년 프로축구 울산 현대에 입단 프로선수 생활을 시작했고, 그 해에 A매치(3월5일 미국 대표팀과 평가전)에 데뷔했다.
A매치 124경기에서 18골을 터트렸고, K리그에서는 1994년 수비수, 1998년 미드필더, 2002년 공격수로 각각 '베스트 11'(14골)에 오르기도 했다.
일본 프로축구 J리그 요코하마 F 마리노스 팀에 진출해서 44골(133경기)을 넣었고, 소속팀이 2003년, 2004년 J리그 2연패를 차지 하는데 결정 적인 역할을 했었다.
유 전 감독은 클럽축구에서 넣은 골도 짝수로 끝냈다.
울산 현대 원클럽 맨으로 34골을 넣었고, 일본 프로축구 J리그에서는 요코하마 F 마리노스(30골), 가시와 레이솔(14골)을 각각 터트렸다. 3팀에서 모두 짝수 골을 넣은 셈이다.
클럽에 한 경기 최다 골도 4골 이었다. 2002년 시즌 프로축구 최종전이었던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는 혼자 4골을 넣으며 팀의 4-2 승리를 이끌었었다.
유상철이 월드컵에서 올린 골도 2골이었고, 한국 선수로 4번째 센추리 클럽(국가대표 100경기 출전)에 가입했다.
홀수 해인 1995년 은퇴
유상철은 2005년 6월3일 벌어진 2006 독일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 전을 끝으로 국가대표에서 은퇴를 했다.
그 후 대전 시티즌에서 처음으로 프로축구 감독이 된 후 전남 드래곤즈 팀을 거쳐서 세 번째 팀인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을 맡고 있었던 2019년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았고, 2021년 6월 7일 저녁 7시 영면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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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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